스에마쓰 폐사(末松廃寺) 터는 7세기 후반에 건립된 사원 터이다. 에도시대부터 알려졌다. 1937년, 현지에 살던 다카무라 세이코씨가 안을 내어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이 장소가 고대의 사원 터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39년에는 국가로부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다카무라씨가 용수로에서 은제 와도카이친(和同開珎: 일본 최초의 유통화폐)을 발견함으로써, 더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66~1967년에 문화청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동서로 폭이 약 80미터 되는 토담 안쪽에서 8세기에 건립된 사원 터를 발견하였다. 그 가람 배치는 서쪽의 금당과 동쪽의 탑을 양립시킨 홋키지(法起寺) 식이다. 금당은 동서 19.8m, 남북 18.4m로,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 크기였다. 그러나 탑은 매우 컸는데, 7층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금당과 탑 이외의 건물은 가람 내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 주위에서는 지붕을 이는데 사용된 기와가 대량 출토되었다. 여러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기와들은 지금의 노미시(能美市)의 가마에서 구워져, 운반되었음이 밝혀졌다. 건립 주체는 당시 인근 일대를 지배했던 호족 ‘미치노키미’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미나미카가 지역의 호족이었던 ‘다카라베노 미야쓰코’가 절 건립에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출토된 유물 중 미나미카가에서 만들어진 토기가 많은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당시의 사원은 누구나가 참배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호족이 일족의 번영을 빌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원을 건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에마쓰 폐사(末松廃寺) 터는 7세기 후반에 건립된 사원 터이다. 에도시대부터 알려졌다. 1937년, 현지에 살던 다카무라 세이코씨가 안을 내어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이 장소가 고대의 사원 터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39년에는 국가로부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다카무라씨가 용수로에서 은제 와도카이친(和同開珎: 일본 최초의 유통화폐)을 발견함으로써, 더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66~1967년에 문화청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동서로 폭이 약 80미터 되는 토담 안쪽에서 8세기에 건립된 사원 터를 발견하였다. 그 가람 배치는 서쪽의 금당과 동쪽의 탑을 양립시킨 홋키지(法起寺) 식이다. 금당은 동서 19.8m, 남북 18.4m로,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 크기였다. 그러나 탑은 매우 컸는데, 7층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금당과 탑 이외의 건물은 가람 내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 주위에서는 지붕을 이는데 사용된 기와가 대량 출토되었다.
여러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기와들은 지금의 노미시(能美市)의 가마에서 구워져, 운반되었음이 밝혀졌다. 건립 주체는 당시 인근 일대를 지배했던 호족 ‘미치노키미’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미나미카가 지역의 호족이었던 ‘다카라베노 미야쓰코’가 절 건립에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출토된 유물 중 미나미카가에서 만들어진 토기가 많은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당시의 사원은 누구나가 참배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호족이 일족의 번영을 빌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원을 건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